○ 방송 : cpbc 가톨릭평화방송 라디오 <열린세상 오늘> ○ 진행 : 윤재선 앵커 ○ 출연 : 한영기 바오로 신부/ 성 라자로 마을 원장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인터뷰 전문]
가톨릭교회 최초의 한센인 자활마을이죠.
경기도 의왕의 성 라자로 마을이 올해로 70주년을 맞았습니다.
성 라자로 마을의 70주년, 한센인과 함께 살아온 교회의 모습이고 그리스도인들이 일군 나눔의 역사인데요.
한영기 성 라자로 마을 원장 신부 전화로 만나보겠습니다.
▷한영기 신부님,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성 라자로 마을이 1950년에 문을 열어서 가톨릭교회 최초의 한센인 마을인데 벌써 안식처가 된 지 70년이 됐네요. 라자로 마을 70년 역사가 전하는 메시지는 뭐라고 보십니까?
▶말씀하신대로 저희 성 라자로 마을이 올해 설립 70주년을 맞이했는데 마을 설립 70주년 행사를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작은 규모로 간소하게 치렀고 70년사 편찬을 준비하면서 최종 편집 단계에 이르렀는데 지난 70년의 역사를 저도 공부하고 정리하고 돌아보면서 생각한 것은 하느님의 일은 경이로울 정도로 기적의 순간순간이었음을 느끼면서 처음 설립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70년 동안 숱한 어려움과 위기에 많이 직면했지만 그때마다 사람의 힘으로는 생각도 못할 일들이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으로 놀랍게 이루어지고 해결되는 역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같은 하느님의 섭리에 수많은 은인들의 사랑이 합쳐지니까 그야말로 이곳에 기적이 모이고 쌓여서 지난 70년이 은총의 시간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느님 섭리와 은총 또 사랑의 시간이 쌓이고 쌓여서 기적이 됐네요. 7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라자로 마을에도 변화가 많았죠?
▶많았죠. 대한민국이 한강의 기적을 통해서 예전에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 때부터 가난했던 보릿고개를 지나서 엄청난 번영을 이룬 것처럼 라자로 마을도 처음에는 정말 비참한 생활을 했었는데 초대 이경재 알렉산더 신부님의 헌신과 노력 역대 원장 신부님과 수녀님들, 후원회원들의 헌신적인 사랑의 노력으로 한강의 기적처럼 엄청나게 아름다운 마을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성 라자로마을 하면 이경재 신부님을 떠올리는 분들 많으시잖아요. 모르는 분들이 계실 것 같아서 어떤 분이셨습니까?
▶말씀대로 이경재 신부님이 안 계셨다면 지금의 천국같이 아름다운 성 라자로 마을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이경재 신부님은 51년에 사제 서품을 받으시고 한국전쟁 기간이었는데 수원의 북수동성당으로 보좌신부로 부임을 하셨는데 51년 12월 24일 성탄 전야죠. 이날 본당에서 미사를 하지 않으시고 청년성가대를 이끌고 지금 우리 마을이 위치한 의왕에 그야말로 비참하게 살아가던 한센 가족들을 방문하셔서 26살의 신부님께서 난생 처음으로 대면하는 한센 환우들을 보고 두려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고 당신의 기록에 그렇게 쓰시면서 100명이 넘는 환우들을 한 명, 한 명 다 안아주시고 청년성가대가 노엘 성탄성가를 부르며 그때 환센 환우들이 처음으로 한국인 신부님이 드리는 미사에 함께하면서 그분들이 눈물을 흘리며 받은 감동은 정말 엄청났다고 신부님께서 말씀하시면서 그때 마음속으로 주님께 ‘주님 이곳에서 평생 이 사람들과 함께 살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부산으로 피신 중이었던 노기남 대주교님께 계속해서 청원을 하셔서 결국은 초대 원장신부로 저희 라자로 마을에 부임을 하셨고 불행하게도 건강이 안 좋아지시고 각혈까지 하시고 어쩔 수 없이 서울교구로 돌아가셔서 워낙 영어를 잘하시고 똑똑하셔서 미국으로 인사명령을 내리려서 한국교회가 당시에 미국의 도움을 많이 받았었는데 미국교구와 서울대교구를 연결하는 연락 사무소의 담당 신부로 10년을 넘게 일하시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단 한 순간도 변함없이 다시 성 라자로마을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고 하는데 결국은 신부님의 기도가 들어져서 1970년에 귀국 하시자 마자 다시 성 라자로 마을 7대 신부로 다시 부임하셨습니다.
▷말씀 듣다보니까 갑자기 성 다미안 신부님도 떠오르고요.
▶신부님께서 학생 때부터 성 다미안 신부, 당시에는 아직 시성이 안 되셨을 때라 복자이셨는데 가장 존경하는 분이 다미안 신부님이었고 그래서 나환자들과 함께 평생을 다미안 신부님처럼 살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라자로 마을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데는 말씀하신 것처럼 장기후원자, 봉사자들의 덕분이 아닌가 싶어요. 후원자와 봉사자들에게 어떤 식으로 감사의 의미를 전하고 계십니까?
▶저희 마을 가족들이 일그러진 손이지만 매일같이 묵주기도를 바치고 성직자, 수도자들처럼 매일 성무일도를 바치고 하루에 6번 기도방에서 모여서 감사의 기도를 바치며 특히 마을을 도와주시는 은인 분들 도와주시다가 후원해 주시다가 떠나신 많은 후원자분들을 위해서 끊임없이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를 드리고 그렇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한센병 발병이 드물잖아요. 그리고 한센인 마을에 거주하시는 분들도 대부분 연로하신 그런 분들이실 텐데 그런 만큼 라자로 마을의 미래에 대한 고민도 크시겠어요. 앞으로 라자로 마을이 어떻게 계속 이어지길 바라십니까?
▶저희가 200명, 300명이 넘던 환우들이 25명으로 줄어들었거든요. 그리고 그 25명이 다 대개 80세가 넘으셨습니다. 지금 앵커님이 말씀하신 그러한 부분을 많이 고민하고 있는데 그 부분은 아무래도 교구에서 또 생각하는 부분도 있고 신중해야 하는 부분이라 제가 이렇게 함부로 속단할 수는 없지만 저 혼자서 이 아름다운 마을을 산책하면서 나름대로 혼자 고민도 하고 주교님께 말씀도 드리는데 이곳에는 아론의 집이라는 아름다운 피정센터도 있거든요. 그래서 나환우들을 위한 시설로서의 소임을 다 마치게 되면 혹시 제 생각은 피정의 장소로 꾸며서 불교에서도 템플스테이가 잘 되고 있는데 저희도 이 아름다운 마을에 영적으로 머물면서 피정도 하시고 아프신 분들 휴양도 하시고 좋은 강좌, 좋은 치유 프로그램 많이 준비해서 그러한 영적 치유센터로 꾸미면 어떨까 또는 요즘 우리나라도 저출산 문제나 낙태문제가 너무 심각한데우리 마을을 미혼모 시설로 꾸며서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전하고 사랑으로 보살피는 복지시설도 상상해보고 혼자 낄낄 웃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이경재 신부님을 떠올리면서 저도 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이곳은 교구의 보물 같은 장소라 제가 함부로 속단할 수는 없고 신중하게 교구와 논의하면서 마스트 플랜을 세우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톨릭 신앙인들이나 일반 사회인들을 위한 라자로마을로 거듭날 수도 있겠군요. 그런 기대를 한번 해보고요. 올해로 70주년 맞은 한센인들의 안식처 성 라자로 마을의 한영기 원장 신부님과 만났습니다. 신부님,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출처 : 가톨릭평화방송 윤재선 기자 leoyun@cpbc.co.kr